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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중심에 선 장식없는 건축… 동화되지 못한 주민 정체성 담다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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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엘 광장의 로스하우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1911년 이곳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이 건물은 무슨 양식인가? 1910년의 빈 양식이다”라고 말했다. ⓒWikimedia Commons

■ 김광현의 건축으로 읽는 풍경 - (36) 로스하우스 끝>

네모난 창문이 무미건조하게 뚫려있는 건물로 비아냥 받았지만… 겉돌던 유대인 새로운 문화 구현
면허 없는 건축가와 그를 신뢰한 건축주… 1910년 ‘빈 양식’ 근대 건축의 기념비

19세기 빈은 30년 전쟁 이후 사회적으로 안정되면서 앞다퉈 화려한 바로크 건물을 건설했다. 그리고 귀족이건 시민이건 새로 지어지는 건축에 말이 많았다. 링슈트라세에 세워진 오페라 극장은 지금 잘 쓰이고 있는데도, 당시의 신문은 장식이 조금 부족하다며, 급기야는 공사 중에 찾아간 황제가 건물이 도로보다 1m 내려갔다고 “물에 잠긴 상자”라고 한 말까지 인용하며 시민을 선동했다. 그리고 소문이 소문을 낳았다. 이에 시달린 건축가인 빈 미술학교 교수는 준공을 앞두고 자살했으며(1868년) 그와 함께 설계한 건축가도 두 달 후에 병사했다.

관심의 중심은 허영을 위한 건축의 장식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근대건축을 알린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성 레오폴드 성당(1907년) 봉헌식이 끝날 무렵 황태자는 “뭐라 해도 마리아 테레지아 양식이 가장 아름답지”라고 말하며 건축가를 비웃었다. 그는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였다. 그 정도로 장식이 없는 근대건축은 냉소의 대상이었다. 이런 냉소는 클림트의 빈 대학 대강당 벽화 사건, 포르노화라고 일방적으로 단정된 에곤 실레, 쇤베르크의 콘서트에서 일어났던 청중 난동 사건 등 근대를 향한 진보적 사고에 대해서도 계속 일어났다.

최대의 스캔들은 빈의 중심인 ‘미하엘 광장에 선 건물’이었다. 사람들은 아돌프 로스(Adolf Loos)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로스하우스(Looshaus)’라고 비아냥거렸다. 역사주의적인 건축물이 즐비한 거리에 광장을 사이에 두고 장엄한 합스부르크 왕궁을 마주하고 있는 이 대지는 위치만으로도 대단한 자리다. 그런 자리에 아무런 장식 없이 하얀 벽면에 네모난 창문이 무미건조하게 뚫려 있는 건물 모습을 당시 신문과 시민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  아돌프 로스의 ‘미하엘 광장에 있는 나의 집’ 강연회 포스터, 1911년 12월 11일, 조피엔잘. ⓒWien Museum
건축주는 신사복점 ‘골트만 운트 잘라치(Goldman & Salatsch)’의 소유자였던 골트만(Goldman)과 아우프리히트(Aufricht)였다. 이들의 주 고객은 귀족과 부르주아 엘리트들이었다. 회사 이름은 유대인 양복 재단사인 골트만의 아버지가 요제프 잘라치와 동업을 해서 지었다. 잘라치가 떠난 후, 아버지는 1896년 빈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인 그라벤에 점포를 냈는데, 아돌프 로스가 이 점포의 파사드와 인테리어를 설계했다. 그 후 아들과 사위 아우프리히트가 사업을 이어받았다. 아버지는 191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묘비는 로스가 디자인해 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로스는 문제의 ‘로스하우스’ 이전에도 이미 골트만가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왕궁은 그 일대를 빈의 중심지로 다시 개조하고자 1893년 궁의 세 건물을 부수고 크게 원호를 그리는 정면을 만들면서 지금처럼 미하엘 광장을 넓혔다. 건축주는 1909년 6월에 약 100년 된 두 건물과 땅을 구입했다. 이들은 민감한 대지의 성격을 고려해 새 건물을 위한 현상설계를 냈다. 다만 신문에 공고를 내지 않고 외부 심사위원 없이 8명의 건축가를 초청한 제한현상설계였다. 그 8명 중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3명이며 그중 두 사람은 젊은 유대인 건축가였고 나머지 5명은 누군지 모른다. 당연히 당선작은 없었다.

로스 자신도 현상설계에 초청됐지만, 최고의 건축가는 1등상을 결코 받지 않는다며 초대를 거절했다고 했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나이가 38세였고, 카페 두 개와 인테리어 작업 3개 정도만 완성했을 뿐 결코 ‘최고의 건축가’는 못 됐다. 이 당시 로스는 골트만 자택의 외관을 고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현상설계라는 형식은 취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로스에게 설계를 맡기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로스보다 5세 적은 골트만은 설계를 의뢰할 때 33세였으나 매우 침착하고 단호하며 야심적인 사람이었다.

로스는 1910년 실제로 이에 대해 글을 썼다.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어떤 불쌍한 남자 둘’이 와서 자기 집 도면을 그려달라고 했는데, 자주 다니던 양복점의 주인이었다. 해마다 양복을 맞추면서 돈을 못 갚아 매년 1월 1일에 보내는 청구서가 한 번도 줄지 않았는데, ‘이 영광스러운 임무로 계산서를 줄이려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나는 법적으로 건축가 칭호를 쓸 수 없는데 나 때문에 경찰서로 불려 가셔도 괜찮겠냐고 했더니 잡혀가도 좋다는 것이다.” 건축주가 이처럼 자기를 신뢰하고 있었음을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로스는 스스로 계약의 세 가지 사항을 밝혔다. 첫째는 자기가 설계를 의뢰받았다는 것, 둘째는 1층 평면을 자기보다 더 잘 만든 사람이 나타나면 자기는 설계를 포기한다는 것, 셋째는 관심은 1층 평면이며 파사드에 대해서는 양측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계약치고는 이상하지만, 특별히 건축의 외관을 조항으로 단 것을 보면 외관은 건축가에게 일임한다는 뜻이었다. 로스가 구상하는 외관에 건축주가 동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장식이 없는 근대건축을 건축주도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로스는 1층 평면도를 작성해서 보냈고 계약을 맺었다.

당시 로스는 건축가 면허가 없었다. 시청 건축과에 제출한 허가 도면에는 엡스타인(Epstein)과 건축주 두 사람의 이름은 있어도 로스의 이름은 없다. 이에 건축주는 현상설계에 제출한 적이 있는 데다가, 로스보다는 11세 적지만 건축가 면허가 있고 상업건물과 아파트 시공 경험이 많은 유대인 엡스타인으로 하여금 돕게 했다. 이 두 사람은 이미 골트만 주택 설계와 시공을 함께하고 있었다. 건축주는 로스의 새로운 건축을 바라며 그의 약점을 이렇게 보완해 줬다.

‘로스하우스’는 주상복합건물이었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1층에서 3층까지의 저층부는 회사가 사용하고, 아무런 장식 없이 외관이 평탄한 4층에서 8층까지의 상층부는 주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과는 다른 외관 도면을 허가도면으로 제출했다. 4층의 창에는 삼각형의 페디먼트를 얹었고, 그 위 3개 층의 창에는 띠를 둘렀다. 원안을 냈다가는 처음부터 허가가 안 날 것이므로 일단 허가를 받은 다음, 시공 중에 설계변경을 넣겠다는 계산이었다. 4개월 뒤 로스는 수정안 두 개를 또 냈다. 하나는 지금처럼 윤곽 장식을 모두 없앤 안과, 상층부 전체를 같은 간격으로 수평 띠를 배열한 안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본래 원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그의 전략이었다. 당연히 허가 과정에서 상층부에 제대로 된 장식이 강력히 요구됐고, 그 대응이 늦어지자 건축주는 4만 크로네씩 두 번의 공탁금으로 8만 크로네를 내고 제출기한을 계속 연기받았다.

이 무렵 공사는 진행돼 상층부의 마감이 도시에 드러나게 됐다. 로스는 대리석 판을 붙일지 말지를 결정하기 전의 하지(下地)라고 변명했지만, 빈 도시는 이미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비평가와 신문은 로스의 이름을 비꼬아 “Los von der Architectur(건축에서 멀어진)”이라는 말을 만들었고, 건물 바로 앞에 있는 맨홀 뚜껑을 보고 지은 집, 곡물창고, 똥차, 눈썹 없는 집, 공장, 감옥, 성냥갑, 잘게 썬 상자, 옷장이라며 이 건물을 비웃기 시작했다. 이때 생긴 말이 지금도 부르고 있는 ‘로스하우스’다. 이에 건축주는 이 건물의 정면은 바로 앞 도로의 연장이고 궁정에 직접 마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며 처음으로 로스를 방어하는 데 나섰다.

이런 비판이 난무하는 가운데 5개월이 지났다. 건축주는 로스가 외국에 간 사이에 ‘파사드의 축조적 효과가 주변에 어우러지면서’ 이미 시공된 상층부를 장식할 방법을 한 달 안에 찾아달라는 두 번째 현상설계를 냈다. ‘오스트리아 엔지니어와 건축가 협회’가 심사를 주관하게 했고, 5명 중 4명의 심사위원 명단과 상금도 공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건축가 로스의 동의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건축주가 선임하는 마지막 한 명의 심사위원이란 아마도 로스였을 것이다.

협회는 당시 오스트리아 건축계의 좌장인 오토 바그너에게 심사를 요청했으나, 결국 심사위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살아 있는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의 일부를 다른 사람이 다룰 권리가 없다며 로스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심사위원 몇 명은 이에 동의하며 사퇴했다. 이들은 이 현상설계는 로스가 자기 생각은 안 바꾼다는 전제하에 이뤄진 것이니, 모든 건축가는 보이콧 하라고 요청했다. 결국 이 현상설계는 결과적으로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아돌프 로스도 직접 도면을 제출하며 선처를 부탁했고, 건축주도 의회에 관(官)이 다른 해법을 찾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후에도 과정은 복잡하지만, 결정적인 해법은 로스가 1911년 10월 24일 정면 5층 창 밑에 구리로 만든 창가 화분박스 5개를 설치한 것이었다. 부시장은 이를 상층부 파사드에 장식을 배열한 것으로 받아주라며, 1911년 11월 13일 전층 사용허가를 내줬다. 결국 건축가와 건축주가 사회를 이겨냈다. 건축주 골트만은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그 무렵 외관이 ‘미하엘 광장에 선 건물’과 똑 닮은 자택을 로스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시련을 극복한 축하의 마음을 담아 로스에게 인테리어까지 부탁했다.

이제까지 이 건물에 대한 건축가 아돌프 로스의 주장은 많았다. 그러나 건축주가 왜 이런 외관의 건물을 짓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인간적 신뢰만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답은 건축주 골트만이 유대인이었다는 데 있다. 당시 빈의 유대인들은 완전히 동화하지 못한 채 도시 안에 살고 있었다. 이때 그들은 빈의 모더니즘은 유대인의 문화와 연결돼 있으며, 그들의 정체성과 해방을 말하는 새로운 언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 건축주나 후원자들은 유대인·비(非)유대인 건축가들 사이에서 무언가의 창조적인 관계를 이루고자 했다. 로스하우스 논란이 한창이던 때, 이미 빈에는 근대주의에서 새로운 건축을 찾는 젊은 유대인 건축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로스의 태도를 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건물의 건축주 골트만도 아돌프 로스의 근대적 건물이 새로운 유대주의 문화를 연결한다고 봤다. 로스도 자신의 건물로 동화(同化)된 유대인으로서 자리를 매기고 싶다는 그들의 생각을 존중했다. 이를 연구한 빈의 젊은 이스라엘 학자 엘라나 샤피라(Elana Shapira)의 말대로, ‘미하엘 광장에 선 건물’은 ‘진보적인 유대인의 동화를 표상하는 새로 배양된 옷’이었다.

사용허가를 받고 약 한 달 후인 1911년 12월 11일, 아돌프 로스는 다 들어가면 2700명이라는 가장 큰 홀에서 두 시간 강연회를 했다. 마지막 자리까지 꽉 채웠다고 하니 3000석 남짓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거의 채운 것과 비슷했다. 대단한 강연회였다.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이 건물은 무슨 양식인가? 1910년의 빈 양식이다.” 유대인 건축주 골트만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이 건물은 무슨 양식인가? 1910년의 유대인이 빈이라는 도시에 동화하는 유대인 문화의 새로운 양식이다”라고.

건축은 사회를 받아 적는 물체가 아니다. 이 건물은 아돌프 로스와 골트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말하고, 동화되지 못한 그 도시 주민의 정체성을 말하고자 한 근대의 기념비다. 그러니 이 건물을 더 이상 침묵이니 비움의 건축의 표본으로 왜곡하지 말라. 한나 아렌트의 식으로 말하자면 건축이란 건축주와 건축가의 사상을 물화(物化)한 것이다.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 용어설명

오토 바그너(Otto Wagner) : 이론과 설계 면에서 근대 건축을 주도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19세기 유행한 역사주의적 건축 경향을 부정하고, 간소하고 실용적인 건축 양식을 주장했다. 대표작으로 빈 광장 정거장, 헤이그 평화궁 등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 18세기 유럽 최대 왕조인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 여성의 왕위 계승이 불가해 황후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 및 신성로마제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왕위계승 전쟁 이후 쇠약해진 오스트리아의 국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유럽 열강의 세력 각축전에서 오스트리아를 견고히 지켜낸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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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8, 2020 at 08:0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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